교육에 닻을 내리고
- 매포초등학교 이진영 -
가정 사정이 곤두박질치면서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공장에 갈 준비를 했다. 일찌감치 돈벌이 하는 것이 가정을 위하는 길이라고 어린 마음에 결심을 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승낙을 하여 계획이 굳어져 갈 즈음, 이웃집에 사는 새댁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어머니로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펄쩍 뛰면서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할 것.’ 이라며 설득하는 바람에 나는 다시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공업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졸업 후 취직을 보장 받은 비누 공장에 실습을 나갔 다가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분수에 넘치게도 대학에 미련을 두었기 때문이다.
공장에 사표를 내고 입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가사를 외면하고 시험 공부에 매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번엔 목장을 목표로 하고 가축 키우기를 시작했다. 소, 돼지, 닭, 오리, 토끼 등을 키우며 경험을 쌓았고 겨울에는 소몰이를 하였다.
소 장수가 산소를 지정 장소까지 몰아다 주는 일이었는데 거리가 약 80리 정도 된다. 점심 굶는 연습부터 해야 돈을 번다고 해서 빈속으로 소를 몰았다. 죽령이라는 큰 고개를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넘노라면 참 서러웠다. 도중의 주막집에서 한 사발 사 먹은 막걸리로 간신히 허기는 면했지만 금세 깨어버리니 젊은 배는 주책없이 도 꾸룩 댔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다가 3수 하는 친구들을 보고 자극을 받아 다시 대학 진학에의 뜻 을 세웠고 낮은 점수이긴 하지만 교육대학에 합격을 했다. 2년 후 드디어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안정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4년제 대학에의 미련 때문에 또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하였고 4년 후 학사 자격을 획득했다.
이제 꽤 학력에 눈이 떠진 셈이었다. 내친 김에 대학원을 욕심 냈다. 이미 가정을 꾸리고는 있었으나 솟구치는 학구열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승진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동기가 부여되어 더 힘을 냈다.
다시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서의 3년 공부가 시작되었고 많은 것을 배운 보람된 시간을 보내며 졸업을 했다.
그 사이 부쩍 자란 자아는 이제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전문상담 교육대학원과 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상담 공부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르쳐 주었고, 신학 공부는 나를 신앙적으로 성숙시켜 주었으며 장로 직분과 함께 아버지학교 운영이라는 큰 화두를 선사해 주었다.
그 사이에 50 중반이 되었지만 이렇듯 나로 하여금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며 지치지 않고 학구열을 발휘하게 한 원인은 어디 있을까? 돌아보니 내 인생이 힘들 기는 했지만 꽤 풍요로웠다고 회고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교육’ 때문이었다. 교육이 나를 이 길로 가도록 붙잡아 주었기 때문 이다. 도중에 주저앉고 싶을 때에도 교육은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삐뚠 길로 가다가도 나는 교육 때문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배고픔과 추위보다 더 무서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교육 때문이었다.
공부 잘 해 봤자 교사밖에 더 되나, 라고 말하는 이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교사가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공부는 신분 상승의 아주 중요한 수단이어서 공부를 잘 하면 대개 잘 살게 된다. 교육은 한 인간의 인생을 기름지게 하는 매우 매력적인 방법이다. 교육의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교육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교육에 진 빚이 많고 내게 허락된 시간은 그 빚을 갚는데 바치리라 다짐하고 있으며, 후손에게 물려줄 첫 번째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교육을 들게 되는 것이다.
작성자 : 단양중 24회 이진영 (현 매포초 교장) 게시자 : 단양중 24회 배흥철 (www.소백산맥.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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